나와 남편은 난임 부부이다. 살짝 억울한 3년 차.
실제로 난임 과정을 진행한 것은 1년 6개월 정도이다.
# 동기
서른즈음 결혼을 했고, 둘이 몇 년을 신나게 흥청망청 살았다.
30대 중반이 되자 슬슬 작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 중 하나가 가족계획이었는데, 오랜 신혼 기간동안 둘이 살다 보니 딩크는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고, 둘의 성향을 보아 우리를 이어주는 무언가가 (마치 고양이같은) 있어야 평생을 더욱 끈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길거리의 아기들이 보였고,
남편이 갑자기 자기를 닮은 딸은 싫다고 돌림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미래에 원망받을 게 무섭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아기를 좋아해서, 아이를 너무 갖고 싶어서와 같은 아름다운 이유는 없었다.
나는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조금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다만 아이를 낳을 거라면 내 거지같은 체력이 하루라도 더 보존될 때 계획적으로 준비를 해야할 것 같았다.
주변 육아중인 친구들을 수소문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보고, (심지어 그들은 나보다 결혼을 늦게 한 친구들이었다.)
처음으로 둘이 손을 잡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해맑게 병원을 갔다. 새로운 세계로 발을 딛는 첫 순간이었다.
# 첫 방문
지인이 추천해준 병원은 난임, 출산병원, 소아과가 모두 있는 아주 큰 병원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어떻게 좋은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지만, 대부분의 난임병원들이 "졸업"하여 실제 출산병원으로 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지금은 이곳이 환자가 다니기에 편리하고 큰 병원임을 안다.
으리으리한 규모와 조그만 아가들이 가득 찬 1층 로비에서 잠시 기가 빨렸다가,
병원에 접수를 하고 진료실 층으로 이동했다. 내가 진료받는 층에는 그렇게 많던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이름을 부르고, 의사선생님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설명하며 자녀 계획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선생님은 천천히 이야기를 들으시고 몇 가지를 물으시더니, '엄마'의 만나이가 아직은 많지 않지만
우선 '엄마, 아빠'가 결혼한지 좀 되어 조건은 맞는 것 같으니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 이곳은 아기가 있건 없건 환자의 호칭은 엄마, 아빠이다. 내가 방문한 대부분의 산부인과는 우리를 잠재적 부모로 불렀다.-
하지만 지금 당장 검사를 할 수 없었다. 우린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었다.
일반적인 스케줄은 생리 후 2-3일에 방문해서 피검사를 먼저 하고, 그 이후에 나팔관 조영술 날짜를 잡아야 한다고 했다.
남편은 그냥 지금 검사해도 되고 내 스케줄에 맞춰도 된다고 했다.
나는 검사에만 병원을 두번에서 세번을 가야하는데 남편은 한 번만 오면 끝이라니 부러웠다.
물론 앞으로 경험할 불편함과 고통과 번거로움의 극단적 불균형에 비하면, 그딴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후후후
몇 주 뒤, 조영술을 하는 침대에서 나는 인생 3N년 중 처음 경험하는 고통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누워 있었다.
조영제를 자궁 안으로 넣고 나팔관이 두개 다 정상으로 뚫려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라고 하는데, 진심으로 누가 뱃속을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원래 고통을 잘 참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추운 것처럼 몸이 달달 떨리면서 눈물이 흐르고, 마음 속에서 진심어린 쌍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 스무번 쯤 걸쭉하게 소리없는 아우성을 외쳤더니 검사가 끝났다고 고생하셨다는 간호사 선생님의 말이 들렸다.
이깟 검사도 이렇게 아픈데 아이는 어떻게 낳지 흑흑흑 생각하며 몸을 추스르고 비틀비틀 내려왔다.
알고보니 나팔관 조영술은 내가 난임 과정 중 진행한 모든 검사와 시술 중, 가장 아픈 검사로 유명했다.
이제 초기 검사는 다 끝났고, 두근두근하며 검사 결과를 기다릴 시간이었다.
댓글